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페인 내전 (문단 편집) ==== 국내 ==== 전쟁 자체가 스페인의 좌익과 자유주의자들의 도전에 대한 우익 보수 세력의 반동으로 시작된 만큼 쿠데타 직후부터 국민파는 끔찍하게 많은 피를 뿌렸다. 이 전쟁에서 수많은 스페인 국민들이 좌익에 가담했다는 명목으로 목숨을 잃었다. 대강 소개하자면 내전에서의 공화파 전사자가 11만, 국민파 전사자가 9만, 부상자 100만, 공습으로 인한 사망자 1만, 영양실조에 의한 사망 2만 5천, 후방 지역에서 암살이나 처형당한 상대 진영 지지자 18만 이상. 내전 이후의 처형은 확실한 수가 남아 있지 않으나 확실한 건 [[1975년]]에 프랑코가 죽는 날까지 정치적인 이유의 [[사형]] 선고는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내전 내내 국민파는 자신들이 한 지역을 장악하면 그 지방의 자유주의자, 노조 가맹원, 정치적 성향이 다른 지식인들, 공화파 진영에 친지를 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싸그리 처형부터 하고 보았으며, 이러한 행위는 교회와 우익 매체에 의해 "스페인 내부의 병적 요소들의 척결과 정화"라는 축복을 받아 자행되었다. 당장 무솔리니의 사위이자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의 고위 인사였던 [[갈레아초 치아노]] 백작은 내전 종결 직후인 1939년에 스페인을 방문해 "세비야에서 80명가량, 바르셀로나에서 150명가량, 마드리드에서 200명 이상이 매일 총살 당하고 있다"고 충격을 표했으며 [[1940년]]에 스페인을 방문한 나치 독일의 한 고위 관료도 그 잔인함에 충격을 금치 못했는데 그 고위 관료가 다름 아닌 [[슈츠슈타펠]]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다.[* 대규모 학살을 계획했던 힘러는 생각보다 비위가 약했다고 하는데 체코에서 하이드리히가 총살을 시연하는 자리를 마련했을때 구역질을 하며 피해 경멸을 샀다는 기록이 있을정도. 간단히 내 눈앞에서 죽이는걸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스페인 내전이 끝나자마자 2차 대전이 터져 살아남은 자들의 운명도 파란만장했다. 내전 이후 살아남은 이들 중 많은 수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망명했는데 그 수는 약 50만으로 추산되며 절반만이 결국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이들 중 많은 수는 프랑스에서 요주의 인물로 찍혀 수배범 신세로 근근히 살아가다가 검거되어 강제수용소[* 스페인 내전이 끝나자 스페인 본토 출신의 공화파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몰려온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자유주의자 등 혁명정신으로 똘똘 뭉친 국제여단 패잔병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오면서 남프랑스는 물론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전역에서 급증했는데 프랑스 정부는 이 '골치아픈' 프로혁명꾼(?)들을 남프랑스를 중심으로 곳곳에 설치한 강제수용소에 쑤셔넣었다. 그런데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하자 이들 수용소는 유대인 강제 수용소로도 겸사겸사 쓰이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이들 중 (주로 유대인) 일부 수감자들은 나치 독일이 직접 운영하는 아우슈비츠 등의 절멸수용소로 끌려가기도 했다. ]에 끌려갔고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 제3공화국]]이 무너지고 나서 프랑코와 히틀러의 협정에 따라 스페인으로 반송되어 총살당하거나 [[비시 프랑스]]와 [[나치 독일]] 치하에서 강제수용소의 이슬로 사라졌다.[* 대부분은 정치범과 외국인 전쟁 포로들이 수감된 마우트하우젠 강제 수용소에 떨어졌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에게 검거되지 않은 채 나치의 침공 속에서도 붙잡히지 않고 살아남은 망명자들은 이후 10여 년 이상 스페인의 파시스트 정부에 대한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 중에서 1만 3천명 가량이 '''[[비시 프랑스]]에 맞서는 [[레지스탕스]]에 가담'''해 싸웠으며 [[샤를 드골]]의 '''자유 프랑스 군단'''에도 3천명 가량이 입대하였다. 이 중에서도 자유 프랑스군 제2기갑사단 산하의 9중대(La Nueve)는 대부분 망명한 스페인 공화파 출신 병사들로 구성되었는데 [[1944년]] 파리 해방 당시 파리에 가장 먼저 입성하여 당시 해방군을 맞이하러 나온 파리 시민들은 해방군이 "에보로", "테루엘", "게르니카", "바르셀로나 1936년 7월" 등의 이름이 도장된 전차들 위에서 공화파식 주먹 쥔 경례를 한 채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면서 파리에 들어오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파일:Liberation of Mauthausen.jpg]] "Los españoles antifascistas saludan a las fuerzas libertadoras 반파시스트 스페인인들이 해방군에게 경의를 표한다" 1945년 여름,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해방 당시 수감된 공화파 스페인인들이 내건 현수막. 스페인 공화파 망명객들이 프랑스 3공 시절의 냉랭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레지스탕스 및 자유 프랑스군과 연대하여 피 흘리며 싸워 준 은혜를 잊지 않았는지 종전 이후에도 프랑스는 서방에서도 프랑코 혐오증을 상당히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샤를 드골]]도 개인적으로는 프랑코와 더 가까운 우익 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잔류한 망명객들을 후하게 대했고 프랑코 정권을 피하여 도망 나오는 난민들을 적극 받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남아서 활동하는 반프랑코 레지스탕스와 후일 부상한 [[ETA(바스크)|ETA]]의 활동을 묵인해 주는 등 스페인 공화파와 긴밀한 사이를 유지했다. 현재까지도 매년 대통령이 직접 참가하여 치루어지는 파리 해방 기념 행사에서는 꼬박꼬박 프랑스 삼색기와 더불어 스페인 공화파의 공헌을 기리는 공화국 삼색기가 같이 진열된다. [[파일:republican flag liberation of paris.jpg]] 파리 해방 기념일 행사에서 2차대전 당시 [[자유 프랑스]]군 군기들과 나란히 걸린 스페인 공화국 삼색기를 사열하는 당시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 사실 프랑스-이탈리아 좌파 정치권에선 당장 파리 시장 [[안 이달고]]부터 스페인 공화파 망명 정치인의 손녀일 만큼 스페인 내전과 역사적 연고가 이리저리 깊다. 멕시코나 아르헨티나, 과테말라, 파나마, 페루, 에콰도르 등 다른 중남미의 스페인어권 국가로 망명한 공화파 인사들은 망명정부와 망명단체를 수립하여 1975년에 프랑코가 죽고 왕정이 복고되어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이 민주화 개혁을 시행할 때까지 저항했으며 중남미 각지의 현지 좌파들에게 정치적, 전술적 교육을 해 주어 훗날 냉전 시기 중남미 좌파 운동의 부상에 숨겨진 공로자가 되었다. 단적인 예로 [[체 게바라]]가 유년기 정치적 의식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게 아버지가 매일같이 집에 불러 같이 놀던 공화파 망명객들이었다고 회고했다. 원래는 군인도 아니고 각각 의사, 변호사였던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를 비롯한 쿠바 혁명가들을 군인으로 훈련시켜 준 것도 스페인 내전 당시 실패한 공화국의 [[발레아레스 제도]] 탈환작전을 지휘했으며, 원래 본인 출신지도 독립 이전 [[쿠바 도독부]] 시절 카마궤이가 고향이었던 군인 알베르토 바요였다. 거기에다가 공화파 고위 인사 1,000명 가량은 전쟁 말기 소련으로 탈출하여 그 중에서 수백 명이 [[소련군|붉은 군대]]에 입대해서 [[독소전쟁]]에서까지 싸운 경력도 있다. 내전 당시 공화파의 가장 유명하고 명망 높았던 장군 중 하나인 엔리케 리스테르가 그러한 경우인데, 이 사람은 [[레닌그라드 공방전]]에도 참가하고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도 협력하여 결국 스페인, 소련, [[유고슬라비아]]라는 3개국의 군대에서 장군 계급을 딴 진귀한 기록을 새우게 되는 등 공화파 잔당의 운명은 시대의 격조와 함께 이리저리 파란만장했다. 사실 공화진영에서 고생은 비공산당계나 비네그린계가 주로 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종전 시점에서 정부 요직을 차지했던 공산당원들은 주로 타이밍 맞게 배 타고 소련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 중도 자유주의 정치인들도 소련만큼 노골적인 빽은 없지만[* 게다가 소련행도 [[대숙청|시절이 시절인지라]] 진짜 사소한 이유로 하루가 멀다고 바로 어제의 인민영웅이 오늘의 인민의 적으로 사형당하거나 굴라크로 끌려가는 일이 빈번했던지라 관점에 따라선 오히려 만만찮게 위험했다.] 전쟁 이전부터 쌓아 온 커넥션도 많고 무엇보다 전후 서방의 냉전기 반공주의에서 그나마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에 주로 서방으로 많이 망명 가 적지 않은 수가 특히 학계, 문화계 중심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가장 독박을 심하게 쓴 건 비스탈린계, 특히 아예 [[러시아 혁명]] 시절부터 공산당과 이를 갈아 오던 아나키스트와 독립공산주의 계열은 대부분 국내에서 죽든가, 프랑스로 육로로 망명했다 2차대전 발발 후 노르웨이에서 외인부대 소속으로 죽거나, 프랑스 점령 후 마우트하우젠에 끌려가거나, [[비시 프랑스]] 정권 아래 북아프리카 수용소에서 강제노역 중 죽거나, 돌봐 주는 열강 빽 없이 사지로 몰렸다. 내전 이전엔 아나키즘과 사회노동당 좌파, 즉 비코민테른 계열 독립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던 스페인의 진보 좌파 정치지형은 이런 프랑코 정권기의 탄압과 정파별 상황에 따라 이후 나머지 프랑스, 이탈리아와 비슷하게 망명 중 처음엔 스탈린의 지령을 따르다가 [[유럽공산주의]]를 받아들인 공산당과 서방에 망명 가 있었던 사민주의 정치인, 그리고 인근 카톨릭 교회의 문화적 영향력 아래 세력을 보존할 수 있었던 카탈루냐, 바스크 지역주의자들이 대신 주류가 되었다. 프랑코는 자신의 카리스마로 군부와 정치권을 점점 장악하여 결국 [[독재자]]가 되어 1975년에 늙어 죽을 때까지 스페인을 지배했다. 프랑코 독재 치하 스페인 또한 냉전 당시 현지 좌파와 정치적 반대파 탄압에 중남미 현지의 우익 군사 독재자들에게 군사 밑 안보 고문을 파견하여 협력했으니 어찌 보면 스페인 내전은 본토에서 끝나니 냉전 시기에 옛날 식민지였던 중남미에서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당시 국민군 주력부대 중 하나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스페인령 모로코]] 지역에서 징집된 병사들이었는데 이들 식민지군 병사들에 의해 자행된 살인, 강간, 약탈 등은 공화파와 관련된 민간인에 대한 의도적인 테러였다. 내전 내내 국민파와 프랑코가 전쟁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중세기의 [[레콩키스타]]를 본딴 '국제 유대-[[볼셰비키]]-[[프리메이슨]] 세력으로부터 스페인을 정화하는 것'이었는데 막상 북아프리카 아랍인 병사들을 데리고 와 스페인 민간인들을 강간하고 쳐죽인 건 본인들이니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일례로 국민군에서는 붙잡은 공화정부 진영 여자들을 무어인 병사들에게 [[윤간|노리개로 던져주는]] 게 당연한 일이었고 이런 행위를 외국 기자들에게 [[철면피|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미국 기자 존 휘태커(John Whitaker)의 기록에 따르면, 1936년 10월 국민파 소속 모로코인 장교 무함마드 메지안(Mohammed Mizzian)이 두 여자를 심문한 다음 40명의 모로코인 병사들이 묵고있는 학교 건물로 보내버렸다. 휘태커가 저 여자들은 어떻게 되냐고 묻자 메지안은 이렇게 답했다. "오, 4시간 내로 죽을 거요." 프랑코의 측근이었던 메지안은 훗날 스페인군 중장(당시 스페인군의 사실상 최고위 계급이었다. 중장 위인 Capita General은 국가원수나 아니면 거의 사후추서용 계급이다.) 자리까지 올랐으며 모로코 독립 이후 [[모로코군]]에 들어가 원수 자리까지 올랐다.][* 엄밀히 따지면 이러한 관행에 가까운 만행은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고 현지인들을 병사로 고용한 웬만한 유럽 열강들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파시즘 추종국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독일 제국의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 역시 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령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영국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를 때 병사들에게 포상으로 강간과 약탈을 허락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시간대적으로 좀 더 가깝고 군국주의나 파시즘의 대척점에 있다고 평가되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샤를 드골]]의 자유 프랑스군에 소속된 북아프리카 무슬림 병사들도 프랑스인 장교들에게 전투 후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이러한 행위를 저질러도 좋다는 허락을 여러 번 받기도 했다. 강간 피해자만 수천명이 넘어가는 몬테카시노 전투 당시의 사례나 슈트트가르트 점령 당시 사례가 그 예시. 이들은 최소한 자국민과의 내전에서 이런 만행을 용인하진 않았다는 점에서 스페인 국민파에 비해 약간은 낫긴 하다. 게다가 [[무슬림]]에게 수백 년간 식민지배를 받아 좌우파 상관없이 전근대 이전부터 민간에서 [[이슬람공포증]]이 만연했던 스페인의 특수성까지 생각하면 내전 당시 국민파의 이러한 만행은 일부 병사들의 일탈이 아니라 명백한 성적 테러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공화파 측의 잔혹 행위도 그 규모 면에서 국민진영에 미치지는 않아도 역시 심각했다. 가장 피해를 본 집단은 [[가톨릭]] 교회였다. 근본적으로 이 당시 스페인에서 교회는 우익 지주들과 뿌리깊게 결합한 반동적 세력으로 인식 되어 좌익의 맹렬한 증오의 대상이었고 내전 이전부터 과격 혁명 세력에 의한 교회 방화 사건 등은 심심찮게 터지곤 하였다. 쿠데타가 터지자 자연히 가톨릭 교회는 국민파 편으로 서서 국민파 점령지에서 자행되는 동지들의 학살을 한치의 꺼리낌 없이 축성했고 이에 분개한 CNT, UGT, POUM 등의 혁명 세력은 눈에 보이는 교회란 교회는 속을 발랑 까 뒤집어 태워 먹고 신부들을 학살하며 감옥으로 쳐들어가 우익 인사들을 학살하는 것으로 회답했다. [[조지 오웰]]은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마드리드에서 파괴되지 않은 교회를 겨우 2개 봤으며 그나마도 모두 개신교 교회였다면서 공화파를 빤답시고 공화파가 교회를 박해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서 pitiful lie라고 경멸을 표했다. 특히 카를리스타 세력의 민병대였던 '레케테' 는 "한손에는 [[수류탄]], 한손에는 [[묵주]]"라 불릴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교도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다만 레케테는 그런 가톨릭 성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국민진영에서는 가장 포로에 대한 대우를 제대로 한 군사집단이었다. 그리고 '''내전 발발 이전에는 카를리스타들의 전통적인 지방자치적 전통을 스페인 군부의 중앙 민족주의에 대치되는 우익 내의 맞불'''로 쓰기 위해 공화정부에서 이들을 무장시키고 훈련시킨 전적이 있어 모로코 용병대 다음으로 국민진영에서 정예로 꼽히기도 했었다. 스페인 현지의 미디어 묘사나 당대의 평가에 따르면 레케테는 군사적으로는 정예인데 인간은 대체로 나바라 지역의 농촌 출신자가 많아서 그런지 그나마 좀 순수한 집단, 팔랑헤는 군사적으로는 그닥 유능하지 않은데 후방에서 사상정화랍시고 약자나 괴롭히는 못된 집단 기믹을 보였다. 정작 사상적 스펙트럼이나 행동하는 코드(가령, 서로를 동무라고 지칭하거나 노동자의 상징인 푸른색을 자기 제복 색깔로 하거나, 인민전선의 인사법인 팔뚝질을 활용하거나) 팔랑헤가 가장 공화 진영과 유사하다는 것, 내전 이전에 CNT와 연대를 모색했던 점은 잊고서. 실제로 모 영화에서는 (13송이 장미) 레케테 출신 장교와 내전 이전 공화진영 쪽에서 일한 여자가 아무 생각 없이 연애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는 사실 카를리스타들 자체가 뭐 인성이 좋았다기보단 이들의 주된 활동 지역이 이념적, 사회적 갈등은 나머지 전국보다 덜한 반면 '그래도 같은 바스크족'이란 지역적 유대감이 강했던 북부 전선이었다는 점과 상관이 있다. 그리고 이때부터가 아니라 원래 카를로스파는 사상 자체가 지극히 20세기 후발 산업국답게 '''무신론자 빨갱이들도 싫지만 지역 사회 작살내는 자본주의도 싫고 우리 고향인 동부 카탈루냐, 바스크 일대의 봉건적 자치권을 적극 수호하겠다'''는 좌파, 특히 중앙 국가에 반대하는 아나키스트들과도 통하는 코드가 있었다. 따라서 프랑코 정권 시절 자본주의적 경제 개발과 강력한 중앙 집권국가 설립을 추구한 스페인의 우익 진영 내분 중 쩌리가 되고, 프랑코가 죽은 후 1976년 몬테후라 살인 사건에서 꼴통 극우 경찰들에게 테러당해 빡칠 대로 빡친 카를리스타들은 공개적인 사회주의 정당으로 전향한 후 공산당과 합작으로 현대 스페인의 통합 좌파당을 만들었다. 현대 카를리스타들은 친가톨릭, 친왕정이면서도 자본주의와 중앙 정부에 반대하는 오묘한 좌파 중에서도 이단아로 분류된다. 사실 가톨릭은 반자본주의, 전통 왕정은 봉건정이라는 걸 생각하면... 다만 오늘날 카를리스타라는 정파는 사실상 소멸된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정치적인 영향력이 소멸한 것과 별개로 카를리스타는 그 태생부터가 19세기 이래의 계몽주의, 자유주의 이념의 한계에 기원한 집단으로 스페인 근현대사에서 독자적인 발자취를 남겼기 때문에 스페인 내전과 별개의 역사적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애초에 이 나라 자체가 지역마다 다른 지방색을 빼곤 얘기가 안 되는 나라고 정치판도 마찬가지다. 현대 마드리드나 세비야, 바르셀로나 같은 스페인 인구, 경제 중심지에서 카를리스타는 진짜 그냥 역사적으로 그런 단체도 있었다... 수준이지만 본진인 바스크, 나바라 지방에선 일종의 정치문화이자 지역 고유의 이념적 유산으로 여전히 의미는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카를리스타 특유의 포지셔닝 덕분에 전국적으로 보면 여전히 유럽 평균에 비해 좌우익 이념대결이 살벌하고 감정도 많이 섞인 전국적 정치지형에 비해 해당 지역에선 좌파, 우파 모두 이념적 대립을 넘어 초당파적으로 존경할수 있는 지역의 역사적 정치 운동으로 대접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현대에도 군소정당으로 존재하긴 하는 카를리스타당이 군소정당 신세를 벗어날 기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사실 세가 작기 때문에 존경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가 컸다면 그냥 공격 대상이지만 작다면 문화유산 취급을 할 수 있으니까.--] 역시 학살 같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완전한 천사는 아니었지만 ''팔랑헤나 군부에 비하면'' 카를로스파는 상대적으로는 착한 것이 맞다. 이념적 코드의 유사성으로 말하자면 팔랑헤(국민생디칼리스트)도 내전 이전 당수였던 호세 안토니오 생전에는 한때 같은 생디칼리스트인 무정부주의자(무정부생디칼리스트)들과 같이 연대하는 것 역시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로 유사한 점이 있기 때문에 볼 수 있기 때문에 완전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더군다나 카를리스타는 바스크, 카탈루냐 지역이 물론 주된 활동지역이기는 해도 거기서만 활동한 것도 아닌 점[*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주인공 조던이 사살한 파시스트군 기병이 바로 카를리스타 출신이었다.]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레케테는 조직 면에서는 옛날 [[조선]]시대 의병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정부군 소속으로 편입된다. 스페인 내전 승리 이후 카를로스파는 유럽에서도 가장 역사가 오래된 반자유주의 세력 중 하나라는 기록을 보유했으면서 의외로 이후 스페인 민주화에도 이름을 남겼다. 2차대전 때는 그들 기준으로 정당한 국왕인 하비에르 공이 2차대전이 터지자 잠시 스페인 활동을 접고 벨기에 군에 종군하거나 프랑스 레지스탕스에도 관여했다가 나치 손에 다하우 수용소에서 체중이 36kg까지 줄어들 정도로 고생했다. 이 외에도 스페인 국내에서 청색사단 반대운동을 전개한 것을 시작으로 독재정권 당시에는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도 관여하기도 했다. 하비에르 공의 아들이자 하비에르 생전에도 실질적으로 카를로스파의 실권자 노릇을 한 큰아들인 카를로스 우고는 프랑코를 만난 자리에서 사회주의 같은 것도 허용을 해야 한다고 대놓고 주장을 하기도 했고, 역시 여동생이자 실권자였던 마리아 테레사는 모스크바에서 부친의 정적이었던 돌로레스 이바루리와 접견하거나 카를로스 우고와 함께 카를로스파를 사회주의로 개조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https://lincorrect.org/la-princesse-rouge-marie-therese-de-bourbon-parme-succombe-au-coronavirus-lincorrect/|자료]] 스페인 내전 종결까지 8,000명가량의 가톨릭 [[사제(성직자)|사제]]들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중에서 12명은 현역 주교들이었을 만큼 타격이 컸으니 가톨릭 교회는 살기 위해서라도 쿠데타군에 가담했다. 물론 개인 차원으로 내려가면 쿠데타와 맞불 혁명 발발 동시에 아나키스트 민병대한테 잡혀 총살당할 뻔했으나 카탈루냐 제네랄리타트(자치정부) 인사들과의 친분을 통해 살아 나온 뒤 이탈리아로 간 후 스페인 주교회의 프랑코 지지 선언문에 사인도 하지 않고 프랑코 정권도 인정하지 않으며 그냥 스페인인 모두에게 처참한 비극이라며 정치 중립적으로 애도만 열심히 한 당시 타라고나 대주교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전반적으로 스페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 가톨릭계가 스페인 내전을 세계적 반공 십자군으로 인식하고 지원했던 와중 바스크 사제들은 종교적, 직업적 소속감과 동향 사람들에 대한 의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고 카탈루냐 가톨릭계는 내전 당시에는 당장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쿠데타 세력을 열렬히 지지했으나 내전이 끝나고 성립된 독재정권의 폭압적인 카스티야중심주의, 지역 언어, 문화 탄압 정책에 반발하며 민주 반체제 인사들을 보호해 주고 교회의 힘을 통해 카탈루냐어와 전통 문화를 정권에서부터 보호하려는 '''프랑코 정권 내 야권세력 1기'''라 할 만큼 정권과 사이가 점점 벌어졌다. 주로 반란 초기에 집중된 이 성직자 학살은 안 그래도 좌익 공화파를 탐탁치 않게 보았던 영국 정부가 확실하게 공화파에게 등을 돌리게 하는 효과를 불러 왔다. 정부가 무분별한 학살을 중단시켰을 때는 이미 늦었다. 고착된 인상을 뒤집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종교 탄압 문제는 오늘날에 일어난다고 해도 가벼운 문제는 아니지만 광신적인 인간들의 도덕성 문제 정도로 치부되겠지만 이때는 정말로 중세적인 [[신성모독]] 행위로 다가왔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세속정치에 공개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던 교황청의 권위가 드높던 이 시절에는 가톨릭 유권자들의 이런 문제에 대한 목소리가 매우 높았으며 교황 [[비오 11세]]가 스탈린의 정교회 탄압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 전 세계 기독교도들이 투쟁해야 한다고 포고를 내리자 유럽과 미국의 지도자들의 대소 외교가 올스톱될 정도였다. 이는 막상 자신들도 [[바스크족]] 사제들을 실컷 죽이고 있었던 국민파가[* 내전 당시 바스크 자치 공화국은 이념적으로는 우익이었지만 공화국 정부에게 자치권을 약속 받아 공화국 편에 섰으며 따라서 나머지 공화군과 다르게 군종 사제, 군인들의 축성 등 종교적 영향력이 여전히 유지되었다.] 열심히 씹어 먹을 선전 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이래 스페인 내전에서 희생된 가톨릭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순교자]]로 인정받아 [[시복]]·[[시성]] 절차가 진행되기 시작했는데 [[요한 바오로 2세]] 때 459위, [[베네딕토 16세]] 때 527위, [[프란치스코(교황)|프란치스코]] 때는 2019년 1월 기준 889위가 복자품에 오를 정도로 [[복자]]가 된 순교자의 숫자가 다른 나라보다 많다. 무엇보다도 공화파의 유명한 큰 실수는 톨레도 공방전에서 알카사르 (요새) 인질 협박 사건이었다. 내전이 터지자 마드리드 외곽에 있는 도시인 톨레도는 주변은 모두 공화파에 붙은 반면 현지 사령관이었던 호세 모스카르도 대령이 우익이어서 혼자서 국민파 편에 붙었다. 이를 진압하려고 마드리드에서 공화군과 아나키스트 무장 노조원들이 톨레도로 쳐들어 와 산 꼭대기에 있는 요새만 빼고 다 점령했다.[* 도시 자체가 옛날 옛적 [[로마 제국]]이 산 위에 세우고 몇 세기 뒤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무슬림들이 산 주위로 성벽을 쌓아 놓은 구조다.] 톨레도 알카사르에 고립되어 치안대와 사관생도들을 이끌고 농성하던 수비대장 모스카르도 대령에게 공화군이 "항복하지 않으면 당신의 아들을 처형하겠다."고 협박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모스카르도 대령은 아들과의 마지막 통화에서 '''"사랑하는 내 아들아, 사나이라면 주님께 영혼을 맡기고 "그리스도 왕 만세, 스페인 만세!"를 외치며 애국자로서 당당히 죽거라''' 라고 작별인사를 한 것이다. 아들 루이스 역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후 루이스는 바로 처형됐다는 설도 있고, 국민파의 폭격에 대한 보복으로 처형되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이 사건은 톨레도 구원 후 숭고한 미담으로서 국민군을 단결시키는 상징이 되었다. 톨레도 자체가 역사적으로 옛 카스티야 왕국이 무슬림들을 몰아 내고 점령한 후 마드리드가 수도가 될 때까지 수도로 삼았던 도시인지라 안그래도 우익 쪽이 침흘릴 상징성이 넘치는 도시였다. 이 이벤트는 결국 40년이 지나 프랑코 사후에도 어떠한 민주화나 체제 변화도 거부하는 언론에서는 '벙커'파라고 불린 정권 내 극우꼴통들이 이 전투에서 이름을 딴 '알카사르'라는 잡지 중심으로 결집할 만큼 당시 우파의 상징 역할을 톡톡히 했다.[* 톨레도의 알카사르는 스페인의 군사 박물관 역할을 하며 사건의 장본인인 모스카르도 본인도 그곳에 묻혀 있는데 2018년에 [[전몰자의 계곡]]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무덤을 이장할 때 [[포데모스]] 당에 의해 알카사르에 있는 하이메 미란스 델 보슈의 무덤과 모스카르도의 무덤도 이장하자고 제안되었다. 그러나 [[VOX(정당)|복스 당]]에 의해 거부되었다.] 안 그래도 스페인 내전 초기인 1936년에는 주로 공화파의 만행들[* 당시 공화진영은 난리통이었던 데다 다들 피난이다 뭐다 정신이 없었다 보니 자기가 경험한 만행을 과장하는 경향도 상당했다. 마지막으로 유언비어까지 파다하게 퍼졌으니...]을 고발하는 기사가 특히 많았는데 여기에 화룡점정을 찍어서 공화진영을 일시적이나마 악당으로 만든 셈이다. 물론 이런 이미지는 공화진영의 선전전+[[게르니카]]를 시작으로 나중에 서서히 알려진 국민진영의 전쟁범죄+내전 막판에 벌어진 [[안슐루스]], [[뮌헨 협정]] 등으로 순식간에 상쇄된다. 이미지 효과가 공화정부에 결과적으로 큰 도움이 못 되어서 그런 거지... 당시 상대적으로 중립적인 위치에 있었던 언론이 타임스지인데 여기에서는 각 진영을 부르는 호칭이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백군/적군(1936년 정도)-우파/좌파(1937년 정도)-국민파/충성파(1938년 이후) 일단 국민진영이고 공화진영이고 처음에는 개판 5분전인 상황에서 체계도 없이 무차별적인 학살을 저질렀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전선과 행정체제가 잡히면서 체계를 갖추게 된 점은 공통적이다. 다만, 스페인 내전 당시 백색 테러와 적색 테러의 확실한 차이점은 (일단 숫자는 둘째 치고)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국민파 점령지에서는 케이포 데 야노와 같은 수뇌부들이 나서서 매일 라디오에서 "오늘은 빨갱이 1,000명을 죽였다. 내일은 빨갱이년 1,000명을 겁탈할테다!"라는 식의 발언으로 학살과 강간을 조장하고[* 케이포 데 야노가 이런 식의 라디오 선전방송 MC로 활동하면서 악명을 떨쳤다. 케이포 데 야노는 세비야-안달루시아 지역의 지역 토호로 프랑코도 어쩌지 못할 거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국민진영이 좀 정부체제를 갖추고 본격적인 승기를 점하면서 다소 안정화 시기를 거친 끝에 이런 방송 프로그램은 1938년에 종료되었다.] 해당 지역에 대한 지배가 확고해지거나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청소'를 지속하여 폭력을 하나의 체제로 만들었다. 내전 초기에는 어떤 의미로는 백색테러는 자기는 소수, 적은 다수인 상황에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진 면이 있다.[* 이는 특히 초반에 점령당했으면서 좌파의 영향력이 강한 동시에 카를로스파와 팔랑헤도 지점 정도는 낼 정도의 존재감은 있던 안달루시아에서 그러했다.] 후기로 갈수록 슬슬 국민진영도 여유도 생기고 특히 물자[* 특히 식량. 농촌을 중심으로 한 국민진영과 달리 대도시를 근거지로 한 공화진영은 내전 말기로 갈수록 심각한 식량난에 시달렸는데 국민진영은 이를 간파하고 내전 막바지에는 하던 폭격도 줄이고 대신 폭격기를 동원해 빵을 뿌리는 선전작업을 수행하는 여유를 보였다. 이는 [[판의 미로]], [[콜 오브 듀티 2#s-10|콜 오브 듀티 2 : 스페인 내전]], [[13송이 장미]]같은 각종 스페인 내전 미디어에서도 묘사된다.]에도 여유가 생기면서 슬슬 전쟁이 아니라 통치의 필요가 커지면서 그 양태도 어느 정도 재판의 외형을 갖추고 한 편으로는 빵도 뿌리고 치안 유지활동도 하면서 한 편으로는 사형수들을 처형대에 보내는 식으로 체계적으로 바뀌었다. 국민파에서도 팔랑헤 좌파[* 얘들은 한때 아나키스트들과 손잡으려고 했던 경력이 있었고, 코드 역시 이들과 맞아 떨어지는 면이 있었다가 그 경력 때문에 스페인 내전 당시 국민파 내의 다른 집단에서 경원시 되었다.]는 노동자, 농민들이 좌파들에게 표 좀 던졌다고 학대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 이 외에도 후안 야구에[* 국민파 진영 내에서 막대한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국내외적으로 명망이 높았던 장군이었다. 당시 스페인에 파견된 콘도르 군단의 독일군 장교들은 은근히 스페인 장교들을 한 수 아래로 취급하던 경향이 있었는데 이들도 후안 야구에만큼은 인정했다.] 장군 같은 거물급 인사 역시 공화파 지역 내의 민간인 폭격에 대해 공개적으로 부정적인 발언을 한 바 있었다. 다만 팔랑헤 좌파는 이것 때문에 [[사망 플래그]]를 찍었고[* 정확히 따지면 종래 팔랑헤당 2인자인 마누엘 에디야가 처형된 호세 프리모 데 리베라 대신 감히 자기가 당 지도자가 되겠다며 반항했고(당시 프랑코는 국민진영 수반이었을지언저 팔랑헤당의 수반까지는 아니었다.) 이것 때문에 반역자로 찍혔다. 위에서 말한 민간인 폭격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도 그 반항의 일환이었다. 심지어 에디야의 지지자들은 팔랑헤당 내에서 다투는 과정에서 대포까지 동원해 당내 반대파를 공격하는 일도 했다.] 후안 야구에는 몇 주 뒤 복귀했지만 한동안 공개석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옥에 갇혀야 했다. 이런 일에서도 알 수 있듯 팔랑헤 좌파는 아이러니하게도 내전 초반에는 열심히 국민진영에서의 학살작업에 적극적으로 주도했다가 제시된 사건 외에도 국민진영에서는 경원시된 노동자, 농민들에게 정치적으로 구애하는 소위 코인질(?)을 하다 다른 우파 세력이 호소하여 프랑코에 제제당한다. 반면 공화파 지역에서 일어난 폭력은 대부분이 혁명적 광분[* 특히 1936년, 1937년에 이런 경향이 더 심했다. 내전 이전에도 정치 테러 등 낌새는 있었지만 이때는 말 그대로 도시 등 후방은 감옥이 제 기능을 상실하는 등 다소 무법천지였다고 한다.]과 피난민 등을 통해 들은 국민파의 만행에 대한 보복적 성격으로, 전쟁 초기만 하더라도 중앙 정부의 통제가 닫지 않은 혁명적 민병대 집단에 의해 산발적으로 자행되었다. 전쟁 마지막 순간까지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국제적 동정적 여론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던 공화파 수뇌부들은 대통령 마누엘 아사냐, 라르고 카바예로 총리, 돌로레스 이바루리, 호세 디아스, 인달레시오 프리에토, 후안 가르시아 올리베르 등의 지도부 인사들이 나서서 잘 통제되지 않던 지지자들에게 "혁명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만행"을 자제할 것을 촉구하였고 실제로 해당 지역이 확실하게 공화파 정부의 통제 아래 놓이면 혁명적 민병대들이 해체되면서 막무가내식의 [[인민재판]]은 공화국 주도세력이 카바예로의 PSOE 좌파에서 네그린의 PSOE 우파로 바뀌면서 소련 [[NKVD]]의 기술지원을 받은 보다 정교한 형태의 탄압으로 형태가 바뀌었다. 실제로 내전 중 총리가 되며 내전 초기 정권의 2인자였던 후안 네그린[* 막상 그 네그린은 정권을 쥐자 공산당과 협력하면서 공산당이 군과 정부조직, 언론의 중요 자리를 차지하고 소련으로부터 검열제도, 비밀경찰, 숙청 등을 수입해오다시피 하는 것을 방조했다.][* 앤터니 비버는 네그린은 제2공화국 이전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이상의 권력을 휘둘렀다는 표현까지 썼다.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프랑코를 벤치마킹해서 스페인 내의 정당들을 전부 단일당으로 통합하려는 시도까지 한 바 있다.][* 다만 네그린이 진짜 공산당의 꼭두각시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네그린의 기본전략은 스페인 내전을 2차대전과 연결지어서 국외의 도움을 받으려고 한 것이었다. 카사도의 쿠데타 없이 몇개월만 더 버텼으면 그게 실현되었을 것이기에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네그린 초기 집권의 원인은 CNT, POUM 등의 혁명세력이 너무 급진적으로 나섰기에 반파시즘인민전선의 통일성을 위배한다고 자유주의자나 공화주의자들 및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공산당의 팀킬과 각종 만행들을 통일성을 명목으로 방조했기에 이 부분은 잘못한 게 맞다. 특히 마지막은 이 때문에 한 때 네그린의 집권을 지지했던 중도 공화주의자나 자유주의자들조차도 결국에는 질려서 무정부주의자와 함께 카사도 쿠데타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만 하더라도 밤만 되면 경호원 없이 사복 차림으로 마드리드와 발렌시아 시내를 돌아다니며 우익 인사들을 끌고 가던 민병대들을 직접 만류하고 다녔다. 하지만 반대로 위에서 나온 [[제5열]] 드립으로 인한 공포+[[대숙청]] 시기의 소련으로부터 직수입한 비밀경찰[* 군 수사국 SIM은 그냥 스페인판 NKVD였다. 이들의 악명이 높아 간혹 이들이 최전선을 방문하면 [[프래깅|눈 먼 탄환으로 실수로 죽는]] 일들이 많았다고.]+고문+공산당의 정권 탈취 기도로 인한 각종 팀킬행위[* 비공산당계 병사들은 장비나 의료지원을 안 해 준다거나 전공을 제대로 대우 안 한다든가 작전 도중 협력을 거부한다든가. 가장 압권인 것은 자기들 마음에 안 드는 군인이나 정치인들을 의사결정에서 배제하거나 심하면 트로츠키주의자나 프랑코나 파시스트 간첩으로 몰다시피한 것이다. 실제로 무고한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조작한 사례도 많았다.]로 인한 만행들이 더 기승을 부렸다. 어찌 보면 산발적이고 야수적일 뿐이었던 만행이 비교적 위계적, 체계적인 탄압으로 바뀐 셈이다. 가톨릭 성직자, 수녀들은 주요 타겟이었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국민진영 지지자들이나 기타 시민들의 피해규모가 더 크다.[* 3만에서 7만까지로 추산하는 게 일반적이고 11만까지 부르는 학계 조사 결과도 있다.] 이 외에도 공화진영 역시 보복 폭격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국민진영의 폭격 등의 소식을 듣게 되면 감옥에서 국민진영 지지자들이나 성직자들을 끌어내 학살하는 일들이 많았다. 이 외에도 공화진영 특유의 파벌 간 갈등으로 인해 민간인들이 학살당한 전례 또한 있다. 대표적으로 바르셀로나 5월 사태 당시의 희생자를 들 수 있다.[* POUM당의 안드레우 닌은 이 과정에서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쥐도새도 모르게 마드리드 NKVD 본부로 끌려가 처형당했다.] 이외에도 공화진영은 농장 등을 집단화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집단화한 농장을 중앙 정부나 공산당이 관할할지, 카탈루냐 헤네랄리타트가 관할할지, 아나키스트들이 자체적으로 관리할지를 두고서도 갈등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도 민간인 희생자가 애꿎게 발생했다. 공화진영이 소련에 금을 주고 무기를 받은 것은 스페인 경제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는데, 당시 [[화폐]] 발행 시스템상 금 보유고가 없으면[* [[금본위제]] 하에서 당시 화폐의 가치는 얼마만큼의 금과 바꿀 수 있는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아무리 화폐를 발행해 봐야 신용도가 없어서 휴지조각과 동일하게 되어버렸다. 실제로 내전 말기로 가면 공화진영의 화폐가치는 [[군표]]급으로 추락했다. 국민진영은 애시당초 반란자금 상당수를 외부에서 받았기 때문에 이런게 없었다. 이 문제는 내전 종결후 주로 북부지역의 광물을 팔거나[* 특히 독일이 이에 관심이 많았다. 독일의 주요 참전 목적 중 하나가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텅스텐(볼프람)을 포함해 괜찮은 원료 수입선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반쯤 소련 괴뢰로 떨어진 [[스페인 제2공화국]]과 달리 프랑코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국내정치에 개입하는 것만은 막았는데 그 수단으로 이런 광물을 먹고 떨어져라 마인드로 제공했다.] 간단한 수준의 공산품을 수출하는 것이 대표적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아스트라 권총]]이 있었다.][* 다만 정치범의 경우 강제노역으로 볼 수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당시 정치범 강제수용소 환경이 혹독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정치범들 선택일지라도 개개인들 입장에는 사실상 강요로 볼 수도 있지만, 감형 혜택은 그렇다 치더라도 규정에 따라 식량을 포함해 일반 노동자 수준의 임금을 지급했고 보다 가족 면회로부터 자유로운 등 인센티브도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불법이지만 가족과 작업장 근처에서 외박도 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본격적인 노동을 하기 전에 2차대전 종결 전후로 이루어진 대대적인 사면, 감형 과정에서 중간에 출소한 사람도 있었다. 물론, 사회적인 [[빨갱이]] 낙인 때문에 일반 노동자 신분으로 [[전몰자의 계곡]] 같은 곳의 건설 현장에서 재소자 시절과 마찬가지로 계속 일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전몰자의 계곡의 경우는 스페인의 정치적으로 중요한 대표적인 랜드마크가 될 예정이라 외국에서 보는 눈도 많았고 현장에서도 노동자들이 외부와 접촉을 꾀할 여지가 많았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대로 인센티브를 지급해서 달랬기 때문에 [[정치범수용소]]에서 받는 대우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래도 괜히 [[윈스턴 처칠]] 같은 우익 인사들마저도 나중에나마 뒷북치며 "공화파를 도와야 했다."고 후회하며[* 서방 정치인들의 프랑코에 대한 평가는 복잡하다. 일단 미국의 루스벨트와 트루먼이 프랑코에 비판적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처칠의 경우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기 전 잘나갈 때는 공화파를 도왔어야 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으나 막상 스페인이 중립으로 남자 적어도 스탈린, 트루먼에 비해서는 훨씬 프랑코에 온건하게 대했다. 물론 그렇다고 스페인이 국제 미아가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드골 역시 프랑코에 대해 개인적으로 우호적이었지만 2차대전 당시 점령 아래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스페인 공화파 잔당 게릴라에게 진 빚을 고려해 집권기 다른 프랑스 정치인들이 유럽 내 프랑코 정권을 고립시키는걸 막지 않았다. 이외에도 미국의 가톨릭 유권자들도 친프랑코에 해당했다.] 파시즘의 태생지였던 이탈리아는 2차대전 직후 국제 사회에서 복권되었지만 2차대전 당시 참전하지도 않았던 스페인은 1950년대 초반까지 국제사회의 [[왕따]]로 남았던 게 괜한 게 아니다. 2차대전 이후 30년 간의 피비린내 나는 과거에서 벗어나 국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평화적 무드를 조성하려고 했던 유럽 국가들에게 있어서 프랑코의 스페인은 당장 역사적 기억 속에서 보여준 야만적인 잔인함의 스케일이 쉽게 용서해 주고 새로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 주기에는 너무 컸으며 '''그게 현재진행형이었다.'''[* 결국 스페인의 EU와 NATO 가입 역시 프랑코가 사망하고 스페인이 왕정복고되면서 받아들여졌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마르크스주의 사학자다.]은 이러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스페인 내전에 대한 나머지 세계의 기억과 이에 따른 프랑코 치하 스페인의 고립을 "민주 스페인에 대한 자유 세계의 철저한 방기와 무시는 전후 자유주의의 양심에 남아 있었던 마주하기 걸끄러운 오점으로 남았다"고 기록하였다. 그것과는 별개로 2차 세계 대전 후 세계 패권의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한 [[소련]]에 맞서 한 명의 아군도 아쉬웠던 트루먼 행정부는 프랑코의 스페인이 철저한 반소련, 반공주의 정권이라는 점에 주목해 관계 개선에 나서 협력관계를 구축했다. 프랑코 정권은 [[마셜 플랜]]에서는 배제되었지만 별개로 미국의 경제적인 원조와 군사적인 원조[* 단 스페인이 원조된 미국 무기를 북아프리카의 식민지 전쟁에 사용하는 것은 용인하지 않았다.]를 받았다. 그 대가로 프랑코 치하 스페인은 미군에 기지를 제공하고 [[6.25 전쟁]]에 참전 의사를 밝히는 등의 유화적인 조치로 응수했다.[* [[북대서양 조약기구]] 가입만큼은 상당히 늦은 1982년에 이뤄졌는지라 나름의 선은 지킨 셈.]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피의 독재자였을지언정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중립을 지킨 것만큼은 스페인 국민들에게 더 큰 비극을 가져다주지 않은 셈이다. 스페인이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다른 유럽 국가에서 보기 드문 현상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유대인]] 문제다. 당시 스페인은 물론 친독 성향의 국가였기 때문에 당연히 독일 대사관을 중심으로 [[반유대주의]] 선전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역시 스페인은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영국과 미국 대사관도 활동했을 것이고 특히 미국 대사관의 경우 프랑코에게도 호소하는 식으로도 유대인 구호활동에 관여했다. 스페인의 대외적 입장은 '우리는 여권을 들고 합법적으로 국경을 통과하는 이들을 막지 않는다'[* 사실 죽기 일보 직전의 막장 환경에서 유대인이 여권을 무사히 챙겨서 출국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다만 실제로는 그냥 위와 같은 정부의 입장을 무시하고 제3국으로 통과하거나 에브로 강 일대에 수용되어 있다가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 쪽 외교관들의 조치 등을 통해 제3국으로 빠져나가는 경우가 많았고 운 없는 이들만이 국경을 못 넘어갔다.] 정도였다. 반대로 특히 앙헬 산스브리즈를 포함해[* 이 사람은 다른 경우와 달리 중앙정부의 승인을 받고서 했다.]을 포함해 특히 외교관들은 일선에서 혹은 외무부를 중심으로 집단적으로 유대인 구호 활동에 나섰고 이에는 심지어 니콜라스 프랑코[* 당시 포르투갈 대사였고 내전기 개국공신 겸 카우디요의 형이다.]도 관여했다. 프랑코[* 사실 프랑코와 유대인의 관계는 복잡하다. 프랑코가 근무한 식민지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식민정부에 협조적이었고 자연히 프랑코도 일부 유대인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내전기가 되면서 스페인도 나치 독일발 반유대주의 선전이 몰려들어왔는데 프랑코 본인은 내전기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다가 2차대전 들어서 독일과 스페인이 국경을 맞대고 히믈러가 마드리드를 방문했을 때는 반유대주의에 대한 립서비스도 여러 번 했다.]는 측근인 후안 블랑코[* 훗날 스페인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되는 그 분 맞다.]를 통해 이런 정황을 알고 있었지만 그냥 방치했다. 이런 스페인 정부 차원[* 프랑코 본인은 그냥 손을 놓았지만 정권 핵심 측근을 포함해 외교관들이 집단적으로 한 것이니 정부 차원인 건 맞다.]에서 이루어진 유대인 구호 활동은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어떤 의미로 [[추축국]] 준회원 취급받던 스페인에 대한 알리바이로 기능할 수도 있었다. 반대로 4~5만 명 가량의 유대인들이 스페인의 손을 거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는데 이는 스웨덴, 바티칸, 스위스 등 다른 중립 성향의 유럽 국가들보다도 더 많은 수치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초기에는 좌파건 우파건 각자 자기가 지지하는 쪽은 선, 반대하는 쪽은 악으로 모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누가 더 좋고 나쁘냐보다 내전 자체를 스페인 역사의 비극으로 여기는 경향이 점차 세를 얻게 되었다. 이 점이 스페인 내 좌우파를 막론하고 널리 합의되었고 이는 스페인이 프랑코 사후에 평화적으로 민주화가 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침묵 협약도 그렇고 [[23-F]] 당시 보여준 극우를 제외한 좌우파의 반응 역시 이런 평가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즉, 어느 한 쪽이 자기들이 절대선이고 남은 절대악이라고 우기면서 싸우기보다는 서로가 정치적으로나마 서로를 인정하게 된 것은 피비린내 나는 그 시절을 반복하기 싫다는 인식을 공유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